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지나간 흔적을 찾아가는 시간이 

그동안 잊고 살던, 나를 만나는 약속을 지키는 시간이었을까?
짧든 길든 약속을 지키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감사하게도 외로움을 느꼈다.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나와 닮은 사람이, 나와 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자신을 비관하던 보잘것없는 인간에서
평범한, 보통의 인간으로 변신할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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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지 하루 만에 책이 왔다.
빈틈없이 포장된 봉투 사이로 책이 엉덩이를 내밀었다.
왜 엉덩이부터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갓 태어난 녀석이 다짜고짜 나보고 고아란다.
(나중에서야 나도 고아였음을 느꼈다)

면상이 궁금해서 앞을 봤더니 얼굴이 없다.
얼굴이 없는 놈의 이름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다.
이름과는 달리 놈은 울 수 없었다.
펼친 책에서 익숙한 슬픈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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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밤 10시 즈음. <운다고...>를 읽다가
허기와 알코올을 느껴 뭐라도 사러 현관문을 열었다.
위에서 아래로 중력에 순응하는데 누군가가 탄다.
10살 정도 차이나 보이는 그에게서 고독함이 느껴졌다.
짧은 적막이 흐른 뒤,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갔으나 편의점에서 만났다.

얼핏 본 그의 손에는 소주가 들려 있었다.
나는 맥주 두어 캔과 간단한 안주를 사고 먼저 나왔다.

우리는 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뒤, 그는 앞에 섰다.
뒤에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고독이 나에게 묻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별들에 외로움이 빛났다.
그 날은 더는 책을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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